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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히스토리/1962년

서울시향 100회연주회기사 경향신문

Sergeant Lee 2021. 3. 10. 09:36

파란속에이룬 악단의 금자탑

경향신문 19621020

시향 100회연주회 경향신문 1962년10월20일자

파란속에이룬 악단의 금자탑

시향22,23양일에 100회 기념연주

동란에 모진수난겪고

한때는 해군서 더부살이까지

 

1948년 김생려단장 계정식지휘로 운영되던 서울관현악단을 모체로 음악동호인40명이 모여 서울교향악단을 발족시켰다.

오늘의 시향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15년 이제 시향은 1백회 기념연주회를갖게 되었다.

오능 22,23양일간(730분부터)시민회관에서 베풀어질 연주회에는 정진우(피아노)안형일(테너) 김학근(바리톤) 황영금(소프라노) 이정희(메조소프라노)등과 각대학 혼성합창단 2백여명이

찬조출연, 김만복지휘하에 기념잔치를 벌인다.

곡목은 멘델스존의 교향곡4A장조와 베토벤의 피아노 및 합창과 관현악을위한 환상곡,

그리고 칼올프 칸탄타 르미나부라나 , 다음은 시향의15년 발자취를 더듬어본 것.

애당초 서울교향악단은 상임지휘자를 두지않고 동인제로하여 잭원지휘에 자코비씨를 위촉했었다.

그러나제1회정기연주는 김성태씨 지휘로 이루어졌는데 곡목은 브람스4번이었다.

자코비씨는 독일계미인으로 당시 방송국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상임지휘자격으로 공을세웠다.

김생려씬 여러모로 시향의 바탕이된 인물인데 그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것은 자코비씨가 귀국한후였다.

그후 10여년동안 김생려씨는 이악단의 운영과 지휘를해왔으며 1961년 오늘의 전임지휘자로 김만복씨가 취임하였다.

그간 객원으로 시향을 지휘한이는 다음과같다.

안병소, 김동진, 안익내.윌리엄스트크랜드() 에드워드 슈트라우스(서독) 오카날()

19504월 서울교향악단은 고려교향악단을 흡수하였다.

고려는 서울교향악단보다 2년앞서 창설되었으나 상임지휘자이던 임원식씨가 도미한후 당시의 이사장 독고선씨는 20여회의 연주에 종지부를 찍고 1천만환상당의 악기와 악보 및 단원을 서울심포니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서울심포니는 40명단원에서 70명의 낙원을 갖는 큰규모의 악단이된 것이다.

625로 이 악단은 낙원을 납치당했고 악기 악보릉 박탈당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군당국의 주선으로 다시 악단이 수습되었다.

처음엔 해군정훈음악대로 편입되었다가 1954년 해군교향악단으로 면모를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명칭만 바뀐것뿐 더욱 악단은 확장증원되었다.

그로부터 4년동안 우리나라 유일의 심포니는 해군의호의로 명맥을 이어왔다.

19573월에는 친선문화예술사절로 2개월동안 동남아를 순연하기도했다.

해군함정을 타고.

19577월 서울특별시의회는 시립심포니의 설치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렇게되기에는 당시 담당행정관의 숨은노고와 에피소드도 있다.

81(1957) 82명의 단원을 이끌고 김생려단장은 시향을 발단시켰다.

1961년에 이르러 악단운영방침이 개정되어 단장엔 부시장이되고 운영연주부분을 양립시켰으며

김씨는 전임지휘자로 19617월까지 이악단과 더불어 지냈다.

김생려씨의 사임후 현지휘자 김만복씨가 취임했는데

시향으로 발단된이래 연주실벅은 다음과같다.

-정기연주회36회 시민위안연주 16회 외빈을 위한 연주6회 친선연주17회 기타65회로 230회에 달한다.

1백회란 정기연주만을 말하는 것이다 현단원은 82명에 3관편성이 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현대작곡가의 곡을 많이초연하고있어 자뭇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아직도 국내작곡가의 곡이 연주되는일이 거의없어 서운한 일이다